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 독립전쟁 (문단 편집) == 전황의 변화 == 때문에 대국민의회가 결정한 주된 전략은 게릴라전이었다. 튀르키예 민간인에 의한 [[테러]]나 소요사태, 무장봉기는 이미 [[1919년]] 전쟁 발발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앙카라]]에서 들어온 공작원과 교관들에 의해 그리스군 점령지 내의 무장군은 점점 더 격렬하고 과감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때문에 그리스군은 빠른 시일 내에 아나톨리아 중심부로 진격해서 전쟁을 끝내기로 하고 그동안 대치 상태였던 형국을 무너트리고 1921년 새해를 기점으로 빠른 속도로 앙카라를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와 인접한 코스탄티니예가 그리스군에게 점령당할 뻔했다.[* 끝내 그리스군이 점령하지 못한 이유는 이미 협상국(주로 영국군)측이 코스탄티니예를 접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스군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협상국은 ''''우리랑 싸울래?''''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그리스군을 쫓아냈다.] 대국민의회군은 [[이스메트 이뇌뉘|이스메트 파샤]](İsmet Paşa)가 이끄는 병력 6천으로 아나스타시오스 파풀라스(Αναστάσιος Παπούλας)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군 2만여를 이뇌뉘강에서 막아세웠으며 비록 대국민의회군이 패하긴 했지만 두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그리스군의 진격속도를 늦추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 튀르키예에서 성씨 사용법이 통과되자 이스메트 파샤는 자신이 분전한 전선인 이뇌뉘강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성을 이뇌뉘(İnönü)로 정했다. 이스메트 이뇌뉘는 아타튀르크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우였으며 아타튀르크 사후 제2대 [[튀르키예 대통령|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국민의회가 그리스군을 막아서는 동안 후방에서는 [[튀르키예인]]들의 집요한 항쟁이 이어졌다. 그리스군의 짐을 운반하는 짐꾼들이 방심한 틈을 타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에 독립군에 합류하거나 길 안내를 자처한 튀르키예인들이 장교들이 방심한 사이에 [[수류탄]]을 터트려 장교와 함께 [[동귀어진]]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여자들은 공장에서 [[총알]]을 만들고 아이들은 어머니를 도와 물자를 전선으로 날랐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튀르키예인들은 끊임없이 항쟁했으며 결국 이는 독립전쟁을 튀르키예의 승리로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8월에 그리스군은 앙카라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앙카라에서 불과 20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아피온-카라히사르 전선(Afyon-Karahisar)이 붕괴되어 그리스군은 사카리아강까지 이르렀으며 이곳에서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장장 21일에 걸친 전투가 벌어졌다. 대국민의회는 필사적으로 이곳을 사수해야 했지만 그리스군의 수가 너무 많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eco-Turkish_War_Map.png|width=600]] 서부 전선의 상황도. [[사카리아]] 전투 당시 튀르키예 대국민의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태에 몰려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